LCK 공개채용 후기 : 이카루스의 날개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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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K 공개채용 후기 : 이카루스의 날개

이라블 17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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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지난번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회 초년생이 배워나가는 1년의 시간이란,

성장기 청소년이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것처럼 거대한 시간이었나 봅니다.

2022년 연말의 불합격 이후로 여전히 불합격과, 통보되지 않은 결과를 눈치껏 알아듣는 시간들을 살았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실패들이 있었다기보다, 낱개의 실패들을 구태여 세지 않았음이 더 맞는 표현인 듯합니다.

'시간이란 정말 흐르기라도 하는지'라는 말은 사실

'시간이란 정말 쌓이기라도 하는지'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씁쓸한 마음이 지나갔다면

시간이 쌓여 그동안 겪어온 또 다른 이야기들을 확인해 볼 시간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또 한차례 아쉬운 기억들을 다듬고 뭉개고 갈아봅니다.

2024년 1월 17일

이것은 새로운 역사를 향했던 한 이카루스의 시작.

출처: LCK

시작은 시즌의 개막이었습니다. 전 시즌이었던 2023 서머 플레이오프 결승전 매치업의 리턴매치로 구성되는 개막전 2경기가 끝나고 하루 방송을 종료하기 직전 채용 공고가 방송을 통해 노출되었습니다. 평화롭게 경기를 보며 헬스장을 누비던 저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죠. 맙소사. LCK 공채라니. 무게를 치던 세트 중간이었기 때문에 저는 가쁜 숨을 고르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후웁..후웁..) 그래... 해보자.' 헬스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솟아나는 아드레날린에 나도 모르게 Hype 되는 느낌을 아실 겁니다. 거의 하입보이였어요. 다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남자는 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큰 소리를 쳤지만 속으론 복잡한 마음이었습니다. 왜냐면 첫 번째로, LCK는 그동안 공채를 연 적이 한차례도 없었습니다. 다른 방송사에서 경력이 있는 아나운서들이 프리랜서로 유입되는 경우가 많았죠. 얼마나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을까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숫자들이 이 기회를 향해 달려들었을 겁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져 봤던 경험은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것 자체를 두렵게 만든답니다. 마침 롤을 하시는 분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전 판에 캐리를 하고 다음 판 시작하면 다시 처음부터 성장해야 할 때 느끼는 그 무력감과 비슷합니다. 15 / 2 / 12 찍고 캐리하던 내가, 1레벨에 도란의 검과 포션 하나 들고 초반 라인전을 할 때의 기분 말이에요. 너무 약하죠? 이 판에 내가 다시 한번 그렇게 성장할 수 있을지, 아니면 0 / 7 / 0 찍고 팀의 원성을 살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취업 전선의 우리가 모두 비슷한 상황이잖아요. 어느 면접에서는 최종까지 갔다가도, 어느 면접에서는 서류에서 볼 것도 없이 떨어지는.

그리고 두 번째는, '성별 무관'이라고 쓰여있지만 사실 이 포지션은 우리나라의 모든 방송사에서 남자가 맡은 적이 없는 포지션입니다.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현장 리포팅', 종료 후 경기를 복기/분석하며 포인트를 집어주는 '매거진' 류 프로그램의 진행은 예나 지금이나 여자 아나운서 분들의 몫이었습니다. 채용 공고의 첫 줄을 읽으며 모든 아나운서 준비생들은 일제히 느꼈을 겁니다; '여자 자리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패스할 거 아니잖아요.

그렇게 오래가지 않은 고민이었습니다.

LCK

그렇다면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쪽 분야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도대체 롤 판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해 드릴게요. 알고 계시거나 별 관심 없이 '빨리 네 얘기를 내놓아라.' 하신다면 아래로 스크롤 해주세요.

리그오브레전드(LoL)'라는 게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영어로 League of Legend이기 때문에 영어 약자로 'LoL', 한국말로 '엘오엘' 혹은 '롤'이라는 말로 불리는 게임입니다. LCK는 한국에서 진행되는 롤 프로 리그의 대회명으로 'LoL Champions Korea'의 약자입니다. 롤의 모회사인 라이엇게임즈의 공식 리그로 각 지역 혹은 국가마다 이 라이엇 공인 리그의 명칭은 달라요. 중국은 LPL(롤 프로 리그), 유럽은 LEC(롤 유럽 챔피언십), 북미는 LCS(롤 챔피언십 시리즈)처럼 말입니다.

사실 롤은 국제적으로 봤을 때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아닙니다. 전체 상금 규모도 7위를 기록하고 있고, 비슷한 장르의 게임인 '도타2(DOTA 2)'가 북미 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을 뿐 아니라 엄청난 파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북미 지역에서 롤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것에도 이 도타2의 인지도 장벽을 넘지 못한 탓입니다. 하지만 국내로 그 시야를 좁혀보자면 스타크래프트의 시대 이후로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게임은 롤입니다.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발로란트, FC 온라인 등의 숱한 도전을 받으면서도 말이죠.

2022년 기준 총 상금액 1위를 달리고 있는 도타2. 리그오브레전드는 포트나이트나 레인보우식스에도 밀린다.(출처: esports earnings)

LOL eSPORTS 시즌

  • SPRING / SUMMER

먼저 각 지역의 자국리그는 스프링과 서머로 나뉩니다. 전 세계적으로 롤e스포츠 리그의 전 시즌 구성은 동일한데요, 두 번의 자국리그, 두 번의 국제전을 치르면 한 시즌이 끝이 납니다. 리그의 시즌 이름은 직관적입니다. 봄에 시작해서 '스프링', 여름에 시작해서 '서머'입니다. 지역마다 참여하는 팀의 숫자가 다르기 때문에 리그를 구성하는 방식은 달라요. LCK의 경우 10개 팀이 2라운드에 걸쳐 2번씩 맞붙는 '더블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시즌을 운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즌을 통해 결정된 순위를 바탕으로 [[1위부터 6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플레이오프는 지난 2022년부터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2라운드에 진출하는 팀부터 한 번 패배하더라도 패자조 경기를 통해 결승까지 올라갈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일명 '원 코인' 혹은 '보너스 목숨'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플레이오프 기간이 늘어나 시즌 일정도 길어지게 됩니다. 즉 리그 흥행을 지속하게 해주는 거죠. 또한 선수들에게도 한차례 기회가 더 있기 때문에 큰 무대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며 추가로 받은 기회를 활용해 '업셋'을 일으키는 등 다양한 재미 요소를 갖고 있는 체제입니다.

  • MSI

스프링이 끝나고 서머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시즌 첫 국제전인 MSI가 진행됩니다. MSI는 Mid Season Invitational의 약자로, 말 그대로 '시즌 중 초대'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스프링과 서머 중간에 있는 국제전이기 때문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예전에는 '리프트 라이벌즈(Rift-Rivals)'라고, 각 지역의 팀들이 자국리그 대표로 나와서 태그매치를 펼친 적도 있었습니다. 국가대항전이었던 거죠. 그때도 참 재밌었는데.

어쨌든 MSI는 국제전 타이틀을 갖고 있는 대회입니다. 더군다나 새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선수들의 이동이 잦은 롤 판 특성상 작년과 전혀 달라진 라인업을 들고 MSI에 나서는 팀들이 생겨요. 그런 팀들이 시즌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친다는 의미에서 MSI는 '작은 월즈'이기도 합니다.

  • WORLDS

정식 명칭은 '롤 월드 챔피언십'입니다. '월즈'라는 이름은 공식 약칭이고, 예전부터 '롤 판의 월드컵'이라는 의미로 '롤드컵'이라고도 불립니다. 그야말로 한 시즌 농사의 풍흉을 가르는 큰 대회입니다. 대회 규모와 네임드를 보자면 월즈 타이틀이 시즌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스프링/MSI/서머를 합친 것이 나머지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월즈의 개최지와 운영 방식은 매 대회마다 달라져요. 그래서 시즌이 바뀔 때마다(한 해가 한 시즌) 달라지는 월즈 규정을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조금 곤란하기도 합니다. 매해 달라지니까요.

한국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게임 강국'입니다. 급한 성격과 게임 공략에 진심인 우리 민족은 새로 출시된 디아블로 시리즈를 이틀 만에 밀어버리고는 '다른 콘텐츠를 달라'라고 할 정도니까요. 롤 판에서도 한국의 성적은 기가 막힙니다. 2013년부터 2023년까지, 3번의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 팀들이 소환사의 컵(월즈 트로피)을 들어 올렸습니다. '페이커' 이상혁 선수의 T1이 4번(2013, 2015, 2016, 2023), 삼성 갤럭시가 2번(2014, 2017), 낭만의 DRX가 1번(2022). 10년 동안 7번입니다.

2018년과 2019년 LPL에게 백투백 월즈 우승을 내주며 주춤할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LCK의 프랜차이즈화 담론, 중국의 막대한 자국리그 투자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왕좌를 내주는 분위기였죠. 근데, 사실 2018년 IG(인빅투스 게이밍), 2019년 FPX(펀 플러스 피닉스), 2021년 EDG(에드워드 게이밍)의 우승 주역은 모두 한국인 선수였습니다. IG에는 '더 샤이TheShy' 강승록, '듀크Duke' 이호성 선수가 있었고 FPX에는 '김군GimGoon' 김한샘, '도인비Doinb' 김태상 선수가, EDG에는 '스카웃Scout' 이예찬과 '바이퍼Viper' 박도현 선수가 있었습니다. 중국의 LPL 투자에는 자국민 선수들의 육성도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제안으로 한국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는 방향도 존재했거든요. 지금도 LPL에는 '카나비Kannavi' 서진혁, '룰러Ruler' 박재혁 선수 등이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어쨌든 뭐, 이렇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지금부터가 진짜입니다.

이렇게나 긴 도입부를 갖고 있는 전설의 한 등장인물이 될 뻔했던 이야기예요.

1차: 서류

밀랍의 날개

출처: LCK

다시 이 사진으로 시작할게요. 분명한 건 내용으로나 채용을 진행하는 방식으로나 상당히 이례적인 채용이라는 건데, 그런 걸 방증하듯 이 채용에는 몇 가지 눈여겨볼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1. 성별 무관

누가 봐도 여자를 뽑을 듯한 포지션 채용에 '성별 무관'이라니, 볼드체 텍스트 처리가 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특이한 이 사항을 강조해 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차하면' 남자를 뽑겠다는 메시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남자 아나운서 인재 풀을 한 번 보겠다는 의지가 아닐 수 없는 형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 프리랜서 아나운서

아나운서들에게 LCK는 어떤 무대일까요? 가장 인기 있는 두 팀인 T1과 젠지가 붙는 날이면 유튜브 시청자 수만 50만 명에 다다르는 '공룡급' 플랫폼입니다. 비교하자니 아프지만 제가 현재 중계하고 있는 K3리그 평균 시청자가 150명이에요. 좋은 퍼포먼스를 보인다면 전국 방송, 행사계의 러브콜과 함께 개인 브랜드 가치의 체급을 달리할 수 있는 쇼케이스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LCK도 중계진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진 않습니다. 다른 일과 병행할 수 있는 프리랜서지만, 언제든 계약을 달리할 수 있는 섬뜩한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3. 자유양식

정해진 폼이라던가, 사람인 채용으로 들어가서 개인 정보를 작성하는 등 통합된 형식의 채용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자유'롭게 작성해서 제출하는 형식입니다. 언뜻 보면 '아 형식은 안 보는구나.'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정형화되고 대중적인 이미지보다는 '자유' 속에서 발굴할 수 있는 '뉴페이스'. 즉, 신선한 인재를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가장 깔끔하면서도 가독성 있게, 그러면서도 예쁜 디자인의 템플릿들을 수정해가며 지원서를 작성했습니다. 다른 대형사들처럼 별도의 페이지를 열어 정보를 기록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 수작업으로 새롭게 제 이력서와 지원서를 만들어갔습니다. 결혼식 사회를 보는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자소서를 몇 번 수정하고 그러면서, 오히려 결혼식은 잔실수를 하고 그랬던 게 기억나네요. 오죽하면 친구가 처음으로 "괜찮아?" 하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포트폴리오가 아주 대박이었는데, 타 방송사에서 제출하는 일반적인 형식의 아나운서 포트폴리오로는 승부를 볼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웬만큼 눈에 띄지 않는 이상 여자 자리거든요. 남성 지원자가 1차라도 통과하려면 포트폴리오 영상이라도 기깔나야 하는데, 다른 사람과 비슷한 플롯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깁니다.

한 마디로,

하얀 배경에 깨끗하게 후처리된 영상

그 가운데 깔끔한 정장을 입고 바른 자세로 서 있는 지원자가

"안녕하십니까, OOO입니다."로 시작하는 영상

이면 안됐다는 거예요.

저는 아예 다른 플롯으로 스토리라인을 짜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습니다. 플레이오프 티저 영상, 선수들 인터뷰 형식을 따왔어요. 정면에 핸드폰 카메라를 놓고 상단 대각선 방향에 카메라를 하나 더 두고 투 캠 영상으로 편집을 했습니다.

이 결과가 대박이었다는 것은 2차 면접 때 밝혀졌습니다.

"포트폴리오 영상을 너무 인상 깊게 봤어요. 저희 작년 결승 때 영상을 참고해서 만드신 것 같더라고요."

1차를 붙었습니다.

2차: 카메라 테스트

날개를 단다는 것

종로 그랑서울 빌딩, 롤파크.

솔직히 말할게요. 경기 보러 롤 파크를 와본 적도 없습니다. 이날이 저의 첫 롤 파크 방문이라는 거였죠. 면접장에는 남자들이 제 생각보다는 꽤 있었습니다. 이틀간 진행되었던 2차 면접에서 마지막 조 마지막 사람이었으니, 말 그대로 제가 2차의 문을 닫는 사람이었습니다.(면접은 한 명씩 들어가서 봤습니다.) 결과와 아무 상관 없었겠지만, 간절한 누군가는 이런 것조차에도 의미를 부여합니다: 내가 궁금해서 마지막에 넣은 거라고. 나를 보는 순간 집중하기 위해 제일 마지막에 나를 부른 것이라고. 실상은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틀 동안 남성 지원자는 총 10명 정도 되었던 걸로 보여요. 여성 지원자들이 50명 정도 뽑힌 듯했습니다.

면접이 가장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제 뒤로는 누구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후련한 마음을 뒤로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입장하는 누군가를 볼 수 없다는 걸 의미했고, 또 제 앞사람이 들어가면 그 넓은 공간에 주어진 기다림은 오롯이 제 몫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차례 동안 심장은 다시 한번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여실히 알려주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했던 기회였기 때문에 이번 면접에서는 난생처음으로 우황청심환을 먹어볼까도 했지만, 마침 설 연휴가 끼어 있어서 임상 실험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도박을 걸기는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맨 정신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은 무거웠어요.

다시 한번 그 순간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내가 해왔던 사실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쓰러트렸어!(회색 화면을 보며)

면접은 재밌었습니다. 누군가는 "면접이 재밌어?" 하며 '얜 뭐지...' 싶은 표정으로 볼지 모르지만, 정말 재밌는 면접이었습니다. 앞으로 방송 인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재밌는 면접을 볼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둥근 원형의 경기장 안으로 입장하면 관중석에 PD 님들이, 그리고 선수들이 입장하는 한 가운데에 제가 서 있습니다. 저는 준비해온 대본을 외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롤파크 크루를 선수로 생각하고 인터뷰를 해요. 그러고는 질의응답이 시작됩니다. 기억에 남는 질문들 위주로 적어볼게요.

Q: 남성 지원자로서 갖고 있는 본인만의 강점

A: 제가 분석데스크에서 인사를 드릴 때부터 쏟아질 수많은 '물음표 핑'들과, "뭐야 우리 눈나 돌려줘요." 와 같은 반응들을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아나운서들이 진행해왔지만, 성별로 인한 친밀감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동경'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여성 진행자와 다르게, 제가 그동안 쌓아왔던 게임에 대한 지식과 애정은 시간이 좀 걸릴지라도, 동네에서 같이 PC방 가던 친구처럼 저를 '우리 롤 형'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 제가 남성 지원자로서 갖고 있는 강점인 것 같습니다.

Q: 현재 LCK 콘텐츠 많이 보는지?

A: 아주 그렇습니다. 밥 먹을 때도, 운동할 때도, 이동할 때도. 모든 경기는 프리뷰쇼부터 경기 종료 분석데스크까지 풀 경기로 챙겨봅니다.

Q: 토익 점수 높은데, 영어 인터뷰 가능?

A: 오 가능합니다.

Q: 현재 메타 파악을 해본다면?

A: (나름의 답변)

Q: 남성 지원자인데, 합격 이후 선배 아나운서들이 잘 챙겨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A: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것만으로 제가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부족한지 직접 물어보며 시선을 이겨내겠습니다. 그리고 저 어릴 때부터 누나들이 많이 이뻐했습니다.

Q: 롤 아이디를 두 개 적어주셨는데 어떤 게 진짜 본인 건가요?

A: 아, 먼저 적은 아이디는 제가 중학교 시절 아빠한테 네이버 아이디 만든다고 빌려간 아버지 명의입니다. 롤이 나이 제한이 있어서 제 이름으로는 못 만들었어서요. 아버지는... 모르십니다. 하지만 저의 혼이 담겨 있는 아이디랍니다.

Q: 결승전에서 패배한 팀의 선수를 인터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떤 질문을 할 건가요?

A: 잔인할 수 있지만 패배를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선수는 다음 단계로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경기 내용적인 질문을 하는 건 불가피하고, 공감과 객관적인 질문을 잘 혼합해야 할 것 같아요.

Q: 진행하는 말투를 보니까 행사 쪽 스타일이 있는 것 같은데?

A: 실제 경력은 캐스터 경력이 더 많습니다. 행사는 결혼식 사회를 사이드잡으로 하고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Q: 우리가 미래에 캐스터 자리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괜찮은가?

A: 기회가 되었을 때 그 자리에 앉아보는 것을 꺼리는 지원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것 역시 내가 아나운서 역할을 충분히 잘 해냈을 때 주어지는 거라고 봅니다.

Q: 아까 영어 인터뷰 가능하다고 했는데 즉석에서 PD 님과 아까 인터뷰했던 내용대로 할 수 있을지?

A: 시간을 좀 주시면 번역해서 해보겠습니다.

-> 프리 토킹이었으면 훨씬 잘했을 텐데 번역 이후 인터뷰라 그런지 내 맘엔 하나도 안 들었음... 어찌어찌 대화랑 의미는 통하게 번역함

Q: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는?

A: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그동안 해왔던 많은 짝사랑들 중에서 저는 유독 기념일과는 인연이 없었는데요. 이번 발렌타인 데이에 LCK에 합격할 수 있다면, 27년 동안 쌓아왔던 달콤함을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만나봬서 너무 반가웠구요, 좋은 기회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나왔는데, 나오는 내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던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준비한 개인기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바깥에 있는 스태프에게 다시 들어가서 이것만 보여주고 나와도 될지 여쭤보고, 저는 다시 들어갔습니다. 카메라를 비롯한 면접 장비들을 정리하고 계셨는데, 감사하게도 저를 바라봐 주셨습니다.

제가 준비를 했는데 이거 안 하고 가면 너무 후회될 것 같아서요.

전용준 캐스터와 성승헌 캐스터 오프닝 차이 성대모사로 준비했습니다.

2차를 붙었습니다.

그치? 너도 내가 좋지?

3차: 최종

태양을 향한 날갯짓

말이 안 됐어요.

분명 '그래 롤 파크 메인 스테이지에서 면접 한 번 봤으면 됐지.'였던 것 같은데,

결과를 확인하고 "우왁!!!" 하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던 2월의 제가 아직도 선연합니다.

합격자들에겐 공지용 전화가 한 통씩 왔습니다. 파격적인 내용이었어요.

"최종에서는 지원자들끼리 게임을 할 생각이에요. 저희가 이미지는 2차에서 다 봤으니까, 최종 오실 때는 정말 동네 PC방 간다 생각하시고 후드티에 츄리닝 입고 편안하게 와주세요!"

미쳤다. 진짜 게임을 한다니. 어디서?

설마 선수들 경기하는 그곳에서?

헐, 그러면 입장할 때랑 끝나고 앞에서 다 같이 일렬로 인사해도 되는 건가?

게임 끝나고 상대방한테 하이파이브 해도 되는 건가?

...되는 건가?

...되는 건가?!!!

면접이 설레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건 하는 거고, 수도 없이 많이 느끼지만 최종이란 결국 '떨어질 확률이 가장 높은 단계'입니다. 최종에 몇 명의 지원자가 올라갔는지, 또 그중에서 남자는 몇 명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최종 날이 되었어요.

결론적으로 게임은 선수들이 하는 곳에서 하진 못했습니다.

선수들 경기 상황에 맞게 이미 세팅이 되어 있어서, 저희가 사용하고 나면 그 설정을 다시 바꿔야 한다더라고요.

대신 선수 대기실에서 게임을 했습니다! LCK의 인터뷰 콘텐츠나 각 구단 별 인 시즌 다큐멘터리를 보면 종종 나오는 곳에서요.

최종엔 총 10명이 올라왔습니다. 그중 남자는 저 하나였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 구성을 보고 저는 기대를 했습니다. 남자를 한 명만 불렀다는 건, '큰 문제가 없으면 뽑아놓고 나머지를 고민한다.'라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롤을 꾸준히 해왔던 사람이 총 4명이었어서, 둘 둘로 나눠서 팀이 꾸려졌고 5 대 5 게임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속한 팀에서는 미드-정글로 롤 유저 조합을 꾸렸고, 제가 정글 바이를 픽했습니다. 게임이요? 제가 있는 팀이 이겼죠, 뭐. 🤷‍♂️

나중에 알고 보니, 게임을 하는 저희 뒤로 다른 관계자분들과 성승헌 캐스터, 또 기존 아나운서님들이 한가득 모여 저희의 플레이와 의사소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2차를 붙고 나서 3차에 게임을 시킨 이유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이력서에 써놓은 롤 티어와 지식, 정말인가.

    • 어쨌든 게임을 좋아하고 알면 유리한 콘텐츠입니다. 욕심이 과하다면 거짓으로 이력서에 롤 티어를 적는 경우가 있습니다. 훨씬 상위 랭크를 적어놓고 친구에게 부탁을 한다던가, 친구의 티어를 적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모든 장르의 게임을 불문하고 '대리'는 게임 콘텐츠의 경계 대상 1호입니다. 직접 플레이를 시켜서 이 부분을 확인해 보려던 것 같아요.

  • 게임하면 나오는 '찐 인성', 문제없는가.

    • 승부욕+인터넷상에서의 익명성 이 두 가지 요소는 게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아(無我)'의 상태로 인도합니다. 부모님의 안부를 묻거나, 욕설을 한다던가, 샷건(키보드/책상 쾅)을 친다던가. 최종 면접에서 이걸 통제 못할 사람들이라면 최종까지 오지도 못했겠지만, 바로 뒤에서 관전하는 만큼 조금 더 사소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메인이벤트가 게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게임이 종료되고 나서 10명의 지원자들이 다시 라운지에 모였습니다.

A4용지 한 장씩을 나눠주고, 방금 했던 게임 내용들을 바탕으로 인터뷰를 서로에게 진행하는 것이 최종 면접이었고, 끝까지 알려주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었어요. 인터뷰 이후에 돌발 상황이 생긴 걸로 가정하고, 성승헌 캐스터와 인터뷰를 하면서 시간을 끄는 게 있었어요.

인터뷰 파트너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군 탑-상대 탑

아군 미드-정글

아군 바텀 듀오

이렇게 진행됐어요.

인터뷰는 무난하게 했고, 개인적으로는 성승헌 캐스터와의 인터뷰를 능글맞게 잘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성캐님이 센스 있는 분이시라 티키타카도 잘 맞춰주셨고, 저는 유일한 남성 지원자인데 후배로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봤었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하시고 퇴장해 주세요."

LCK에서 13년 만에 처음으로 가렌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정글에서 람머스도 11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역사는 계속되고, 그 무한한 반복 속에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오버워치 트레이서 대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설의 집'인 이곳 LCK에서, 'LCK 최초 남성 아나운서의 분석데스크 진행'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모든 면접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카루스 서사의 결말은 추락입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태양에 닿을 것 같았던 순간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 떨어지는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는 기승전결인 듯합니다.

애정을 담아 쓰다 보니 서론과 면접의 이야기가 매우 길어져, 정작 '떨어진 후기'는 따로 담아야겠군요.

결과는 2월 중에 나왔습니다.

합격자는 엠바고가 걸려 있었지만, 누군지는 알고 있었어요.

발표가 난 뒤로 이 글을 적어내려가다가 지인에게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친분 있는 사람이 LCK 면접에 있었는데, 제가 정말 잘했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뒤로 약 4달간 이 글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지냈느냐 묻는다면,

괜찮다가, 괜찮지 않다가

이제는 '이 시간과 과정이 내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보는 단계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전히,

어떤 거대한 뜻이 나를 이끌어가는 걸까요.

혹시나 그 뜻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요?

만약 아니라면, 무엇이 앞으로의 나를 움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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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Edmund Hettinger DC

Birthday: 1994-08-17

Address: 2033 Gerhold Pine, Port Jocelyn, VA 12101-5654

Phone: +8524399971620

Job: Central Manufacturing Supervisor

Hobby: Jogging, Metalworking, Tai chi, Shopping, Puzzles, Rock climbing, Crocheting

Introduction: My name is Edmund Hettinger DC, I am a adventurous, colorful, gifted, determined, precious, open, colorful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